화면 뒤의 사람들을 처음 발견한 날
어릴 때부터 게임과 애니메이션을 좋아했어요. 투니버스와 애니원 같은 한국의 애니메이션 채널을 보며 자랐고, 게임도 단순히 플레이하는 재미보다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는 작품에 끌렸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임은 《테일즈위버》예요. 챕터를 진행할수록 넓어지는 세계관을 보며 ‘게임 안에 이렇게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들 수 있구나’ 생각했죠.
애니메이션으로는 《카레이도 스타》와 《강철의 연금술사》를 좋아했습니다. 《카레이도 스타》는 처음에는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역처럼 보이던 인물이 나중에는 다른 면을 보여주고, 밝기만 해 보이던 주인공도 시련을 겪고 다시 일어나는 과정이 좋았어요. 《강철의 연금술사》에서는 에드워드 엘릭이라는 인물에게 특히 끌렸고요. 최근에는 같은 작가의 《황천의 츠가이》도 역시 작가님답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성우라는 일을 선명하게 의식한 계기는 인터넷에서 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녹음 현장이었어요. 화면 뒤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작업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그 모습이 정말 멋있었습니다. 마침 중학교 점심시간마다 방송부 선배들이 라디오처럼 음악을 틀고 멘트를 했어요. 평소 성우를 동경하던 마음으로 방송부 시험을 봤고, 합격한 뒤 중학교 내내 아나운서로 활동했습니다.
안내 방송을 넘어 집에서도 캐릭터 연기를 녹음해보고 싶었어요. 용돈으로 살 수 있는 2만 원짜리 콘덴서 마이크를 주문한 뒤, 연결하는 법부터 녹음 프로그램과 편집 방법까지 하나씩 찾아가며 배웠습니다. 혼자 녹음하고 끝낸 것은 아니었어요. 인터넷 성우 동호회에서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과 작품을 만들고, 어딘가에 올린 결과물로 피드백과 칭찬을 주고받았습니다. 수익이 생기는 활동은 아니었지만, 함께 무언가를 완성하는 과정 자체가 즐거웠어요.
처음 자기 목소리를 녹음해 들으면 어색하다고들 하잖아요. 저는 중학교 방송부에서 계속 제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비교적 일찍 익숙해졌던 것 같아요. 대신 처음 녹음했을 때와 1년쯤 지나 다시 녹음했을 때 소리의 질감이 달라져 있는 경험은 분명히 했습니다. 누가 체계적으로 가르쳐주지 않아도 계속 듣고 따라 하고 녹음하면 소리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알게 된 거죠.
그때는 중학생이 성우 학원에 다니는 일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고, 온라인 강의를 올려주는 사람도 거의 없었어요. 학원에 보내달라고 말할 용기도 없어서 애니메이션을 듣고 따라 하며 혼자 익힌 셈이죠. 다행히 크게 잘못된 버릇이 들지는 않았고, 녹음을 계속할수록 ‘나는 성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분명해졌습니다.
입시를 앞두고 어머니께 성우가 되고 싶고 연기학과에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어머니는 꿈 자체는 지지해주셨지만, 성우가 되기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이미 들으셨기 때문에 한 방향만 바라보기보다 다른 계획도 준비해두라고 조언하셨습니다. 그 말을 따라 고민한 끝에 성우와 조금이라도 가까운 방송 계열 학과를 선택했어요.
점심시간의 수업과 일곱 해의 시험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방송국 뉴스부 조연출로 일했어요. 처음에는 부모님의 도움으로 학원을 다녔지만 계속 손을 벌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직장과 공부를 병행하고 싶었습니다. 부장님의 양해를 구해 점심을 5분 만에 먹고 버스로 펀스쿨 서초점에 가서 김광국 선배님께 일대일 수업을 받았어요. 수업이 길어지면 “선생님, 저 늦으면 민폐예요”라고 말하며 아쉬워서 뛰어나오곤 했습니다.
방송국 일은 아침 일찍 시작해 늦게 끝났고, 주말까지 학원에 다닐 체력은 없었어요. 결국 병행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지만 뉴스부에서 얻은 것도 있었습니다. 플로어 디렉터로 생방송 뉴스를 매일 두 번씩 들으며 한국어의 장단음과 정확한 발음에 익숙해졌어요. 애초에 학원비를 벌기 위해 택한 직장이었으니 열심히 저축한 뒤 퇴사했고, 그때부터 성우 공부에 거의 전념했습니다.
지원할 수 있는 공채 시험은 나올 때마다 모두 봤어요. 첫 시험은 대원방송 5기였고 당연히 떨어졌습니다. 얼마 뒤 KBS 시험에서는 처음으로 1차에 합격했어요. 어차피 붙을 리 없다고 생각해서 ‘학원에서 하던 대로 재미있게 하고 오자’는 마음으로 편안하게 임한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현장 시험 다음 단계가 바로 최종이었는데, 그 자리에서는 종이를 바들바들 떨다가 장렬하게 떨어졌습니다.
그 뒤 투니버스 시험도 바로 1차를 통과했어요. 어렵다는 첫 관문을 연달아 넘으니 금방 성우가 될 수 있겠다는 교만한 생각도 잠시 했습니다. 하지만 1년, 2년, 3년이 지나도 되지 않았고, 오히려 1차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졌어요. 처음에는 ‘언젠가는 되겠지’ 하던 낙천적인 마음도 해가 거듭될수록 불안으로 바뀌었습니다.
스무 살부터 합격한 해까지 햇수로 일곱 해였습니다. 그 사이의 시험을 거의 빠짐없이 봤지만 2차 이상 올라간 적은 많지 않았고, 대원방송 10기에서 처음 최종 전형까지 갔어요. 그곳에서 떨어졌을 때는 1차 탈락과 느낌이 전혀 달랐습니다. 기대가 커진 만큼 좌절도 컸고,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 잔인하게 느껴졌어요.
그래도 힘들어하는 데 머무르기보다 다음을 위한 행동을 하려고 했습니다. 대교 성우 시험에도 지원했고, 대원방송 11기 시험을 볼 때는 이번에도 안 되면 이듬해 다시 취업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리고 그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정말 기뻐서 울었어요. 마침내 어릴 때부터 꿈꾸던 일을 하며 살 수 있다는 설렘과, 이 안에서 열심히 해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긴장이 함께 왔습니다.
다른 목소리보다 먼저 배워야 했던 것
학생 시절에는 제가 KBS나 EBS 같은 한국의 방송사 성우극회와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내레이션을 칭찬받기도 했고, 당시에는 KBS를 라디오 드라마에 강한 곳으로, EBS를 다큐멘터리 내레이션부터 애니메이션까지 폭넓게 경험할 수 있는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반면 대원방송이나 투니버스처럼 애니메이션 채널을 운영하는 회사의 성우극회에는 개성 강하고 캐릭터를 선명하게 표현하는 사람이 어울린다고 여겼어요. 제 음색은 평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원방송에 갈 것이라는 말은 거의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변성에 집착했어요. 성우끼리는 서로 자신에게 없는 것을 부러워하는데, 저는 캐릭터성이 강한 목소리를 만들 수 있어야 연기가 완성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들은 목소리를 바꾸는 일에 매달리지 말고 말의 본질을 보라고 하셨어요. 그래도 제 녹음을 들으면 감정이나 말의 의미보다 캐릭터에 어울리는 음색인지부터 판단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그 걱정을 잠시 내려두고 연기에만 몰입해봤어요. 그러자 감정과 말의 의미가 더 잘 보였고 표현도 자연스러워졌습니다. 목소리를 만드는 연습이 쓸모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지금은 배역에 필요한 재료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떤 소리를 내느냐보다 왜 이 말을 하는지, 누구에게 어떤 마음으로 건네는지를 먼저 봐야 한다는 사실을 그때부터 중요하게 여기게 됐어요.
클로에의 물음표와 마스트의 낯선 말투
《트릭컬 리바이브》의 클로에는 처음 일러스트를 보자마자 볼이 너무 귀엽다고 생각했어요. 높고 단단한 소리를 꾸준히 만들어야 해서 편한 톤은 아니지만, 예전에 변성을 연습했던 경험이 도움이 됐습니다. ‘광기’ 속성이라는 정보만 보고 처음에는 서늘한 인물인가 싶었지만, 세바스티안이라는 인형의 말을 유일하게 들을 수 있고 다른 친구들에게 상식적인 일침도 건네는 성숙한 면이 있었어요. 새침하고 퉁명스러우면서도 세바스티안에게는 동생을 대하듯 애정을 보이는 차이를 늘 염두에 둡니다.
클로에의 독특한 감탄사는 대본에 처음부터 적혀 있던 설정이었어요. 높고 단단한 소리에서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으면서도 듣기에 거슬리지 않도록 코에 가볍게 걸어 만든 소리입니다. 같은 표현이라도 당황했을 때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마주했을 때의 감정은 다르잖아요. 단순한 버릇처럼 반복하지 않고, 장면마다 의심과 놀람, 어이없음의 정도를 달리하려고 합니다. 팬분들도 그 차이를 이미 알아봐 주시는 것 같아요.
팬들이 ‘건치컵’이라고 부르는 굿즈는 클로에의 눈과 환한 미소가 컵 옆면에 이어지는 디자인이에요. 처음 나왔을 때 정말 갖고 싶었는데 온라인에서 완판되어 아직 구하지 못했습니다. 돈을 받고 녹음하는 입장에서 굿즈까지 달라고 하기는 염치없다고 생각해 말하지 못했지만, 기회가 생긴다면 꼭 구하고 싶어요.
에피드게임즈가 성우와 캐릭터를 가깝게 느끼게 하는 테마극장을 계속 만들어주는 것도 고맙습니다. 평소에는 귀엽고 엉뚱한 웃음이 중심인 작품이지만, 아야의 테마극장 〈얼어붙은 너의 이름 위에〉에서는 엘다인들이 그동안의 갈등을 풀어가는 진지한 이야기가 펼쳐졌어요. 클로에가 울분을 터뜨리는 장면을 녹음할 때는 높은 톤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잊고도 클로에의 말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캐릭터의 감정에 완전히 들어가 말할 수 있다는 경험을 준, 저에게는 고마운 배역이에요.
《승리의 여신: 니케》의 마스트는 녹음할 때 가장 즐거운 캐릭터예요. 개구진 미소와 양갈래 머리를 보고 처음에는 귀엽고 발랄한 소녀로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대사를 읽어보니 해적을 꿈꾸는 해군이라는 설정에 독특한 말끝까지 붙어 있었어요. 현장에서는 제가 준비한 것보다 톤을 편하게 내려놓고, 항구의 선원처럼 구수하고 조금은 아저씨 같은 말투로 해달라는 디렉션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귀여운 인물에게 아저씨 같은 말투를 입혀도 유저분들이 좋아할지 걱정했어요. 제작 의도를 따라가면서도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어긋나면 소녀가 아니라 할머니처럼 들릴 수 있어서, 제작진과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정성껏 조율했어요. 공개 직후에는 낯설어하는 반응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팬들이 그 독보적인 성격을 귀여워해 주는 모습을 봤습니다. 지금은 캐릭터를 기획한 분의 선구안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마스트는 오디션이 아니라 제 샘플을 듣고 지명해준 배역이라 현장에서 함께 만들어갔습니다. 스킨이나 이벤트 스토리를 통해 해마다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좋아요. 한 번의 녹음으로 끝나지 않고 같은 인물의 시간을 계속 이어가는 즐거움을 알려준 캐릭터입니다.
플레이하던 세계에 제 목소리가 들어갈 때
《원신》은 출시 이틀째부터 시작한 오픈 유저예요. 공부와 대원방송 전속 생활 때문에 한동안 멈췄지만, 프리랜서가 되면 꼭 호요버스 작품에 참여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클로린드 오디션을 받았을 때는 기회가 온 것만으로도 감사해서 마감일까지 세 가지 버전을 만들었어요. 합격 소식을 들은 뒤에는 이나즈마에 머물러 있던 게임을 수메르까지 단숨에 진행하며 폰타인에 갈 준비를 했습니다.
결투대리인 클로린드는 원칙적이고 각이 잡혀 있지만, 나비아 앞에서는 한결 편안해지고 의외로 게임을 좋아하는 면도 있어요. 그런 설정이 이야기 속에서 드러날 때마다 재미있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첫 등장 장면이에요. 나비아와 여행자 일행이 곤경에 빠진 상황에서 로봇 군단을 이끌고 오는 듯해 처음에는 악역처럼 보이지만, 곧 그 로봇들을 베어버리며 등장하죠. 짧은 호흡 하나까지 디렉터와 한 땀 한 땀 정성껏 만든 장면입니다.
클로린드는 폰타인 초반부터 등장했지만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어요. 저 역시 픽업을 기다린 유저라 처음에는 명함과 전용 무기만 뽑으려다가 2돌이 좋다는 말을 듣고, 다시 풀돌이 좋다는 말을 들으며 계속 뽑았습니다. 결국 5돌에서 멈췄는데 마지막 하나가 계속 마음에 남았어요.
복각 때 한국어판 페이몬 역의 김가령 선배님이 마지막 돌파를 방송 콘텐츠로 만들자고 제안해주셨어요. 그런데 방송을 시작하자마자 클로린드가 바로 나왔습니다. 기쁘면서도 준비한 방송 분량이 사라져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나요. 지금은 게임의 환경이 달라져 예전만큼 자주 선택되지 않더라도, 다시 많은 분이 클로린드를 활용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젠레스 존 제로》의 니콜 데마라는 출시 전 여러 배역에 지원할 수 있었던 공개형 오디션에서 만났어요. 목록의 앞부분에 놓인 데다 외형도 워낙 매력적이어서 중요한 캐릭터처럼 보였습니다. 지원은 했지만 제가 맡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보이시하거나 멋있는 다른 배역을 노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여러 오디션 파일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다 니콜 역을 맡았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는 공채 합격에 버금갈 만큼 기뻤어요. 기대하지 않으려 했을 뿐, 마음속으로는 그만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왈가닥스럽고 에너지가 넘치며 소리치고 튕기는 코믹한 장면을 좋아해요. 니콜이 돈만 밝히고 교활한 토끼굴의 동료들에게 돈 문제로 짜게 구는 모습을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들려줄 수 있을지 고민하며 늘 텐션을 끌어올립니다. 하지만 동료들이 위험에 빠졌을 때 자신이 지켜야겠다고 결심하는 장면에서는 평소 니콜의 과장된 톤을 걷어내고 진지하게 연기했어요. 그 차이가 유저들에게 상황의 심각성을 알릴 것이라고 제 의견을 말씀드렸고, 나중에 그 장면이 쇼츠로 만들어져 많은 분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저도 아끼는 장면이에요.
처음 공개된 영상에서는 니콜이 어릴 적 고아원에 있던 이야기가 잠깐 나왔지만, 그 뒤 혼자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떻게 교활한 토끼굴을 만들게 됐는지는 아직 충분히 다뤄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로프넷에서 지금의 평판을 얻기 전까지 어떤 시간이 있었는지 저도 무척 궁금합니다.
《원신》을 즐기고 클로린드를 녹음하던 무렵, 《명조: 워더링 웨이브》도 큰 기대를 받는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성우라면 유명한 게임이나 작품에 참여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잖아요. 저 역시 이 작품에도 들어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디션이 아니라 지명으로 캐스팅 연락을 받아 더 부담이 생기기도 했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장리의 목소리를 맡고, 공개 뒤 유저분들에게 많은 긍정적인 반응까지 받아 개인적으로 무척 감사한 캐릭터입니다.
캐릭터 시트의 일러스트를 미리 봤을 때만 해도 지금처럼 강한 인상을 받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인게임의 장리를 처음 보고 일러스트보다 게임 속 인물이 더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매혹적인 캐릭터를 본격적으로 연기한 것도 장리가 거의 처음이었어요. 여우 같은 눈매를 보고 매혹적인 느낌을 강조해 준비했지만, 디렉터님은 섹시함에만 치우치지 말고 지략가의 지성도 놓치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 두 방향을 절충해 지금의 장리가 만들어졌어요.
장리는 머리가 좋은 인물이고 금희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금희에게는 선생님처럼 말하지만, 방랑자에게는 승소산의 일을 해결할 사람이라고 점차 확신하며 말투와 행동이 조금 더 부드러워져요. 그 관계에 따라 생기는 미세한 차이를 두고 연기했습니다.
명떡 님과 함께한 방송에서 많은 분이 찾아와 장리를 향한 애정을 보여주신 일도 잊지 못해요. 다만 장리는 초기 버전의 승소산 이야기 이후 본편에 다시 등장하지 않아, 저는 아직 두 번째 녹음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뒤로도 아름답고 멋진 인물들이 계속 등장했는데 장리가 인기 순위 상위권에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놀랐어요. 쿠로게임즈도 여전히 장리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아주고, 다시 이야기에 불러주면 좋겠습니다. 팬분들과 함께 저도 그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꾸미지 않은 목소리로 만난 루미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루미는 우연히 찾아온 인연이었어요. 작품을 연출한 PD님과는 그때까지 아무런 인연이 없었고,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났습니다. 다른 작업을 하러 같은 녹음실에 갔다가 일을 마치고 로비에서 아주 짧은 전화를 했는데, 마침 루미의 목소리를 계속 찾고 있던 PD님이 안에서 제 평소 목소리를 들으셨다고 해요. 그 시간에 그곳에서 전화를 한 일이 운명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PD님도 다른 인터뷰에서 어디선가 목소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았다고 말씀하셨다고 해요.
처음 오디션을 볼 때는 작품 제목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대본을 통해 이 인물이 케이팝 아이돌이면서 악귀를 퇴치하는 전사라는 점만 짐작할 수 있었어요. 이전에는 보기 어려웠던 조합이라 신선했고, 전체 작품 안에서는 어떻게 어우러질지 궁금했습니다. 나중에 시사회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나니 예상보다 훨씬 재미있고 노래가 정말 좋다는 두 가지 생각이 들었어요.
작품의 인기가 예상보다 훨씬 크고 오래 이어지면서 주변의 선배님들께 축하와 연기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성우로 활동하며 이렇게 인기 있는 작품의 주연급 인물을 맡을 기회는 한 번 올까 말까 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기회가 저에게 너무 빨리 온 것 같아 지금도 조금 겁이 납니다. 제가 잘해서 맡은 것이라고 말해주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여전히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작품이 공개된 뒤에는 자녀에게 들려주고 싶다며 루미의 목소리로 짧은 개인 메시지를 녹음해줄 수 있느냐는 부탁을 학부모인 지인들에게 여러 번 받았습니다. 제가 녹음해 전달하면, 아이들이 그 목소리를 듣고 좋아하는 모습을 부모님들이 영상으로 찍어 다시 보내주셨어요. 저도 어린 시절 화면 속 성우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그것을 무척 좋아했던 사람이잖아요. 이제 제 목소리를 듣는 아이들의 반응을 직접 마주하는 일이 감사하고 뿌듯하면서도 특별하게 느껴졌습니다.
루미는 제 연기관이 많이 바뀌고 확립되는 계기가 된 인물이기도 합니다. 학생 때부터 목소리를 다르게 만드는 일에 집착했고, 성우가 된 뒤에도 그 습관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루미는 PD님이 우연히 들은 제 평소 목소리에서 시작된 배역이었습니다. 오디션부터 실제 녹음까지 목소리를 너무 만들지 말아달라는 요청을 계속 받았어요.
늘 배역에 맞는 톤을 입혀야 한다고 생각했던 저에게는 화장 없이 민낯으로 서는 듯한 요청이었습니다. 중요한 인물인데 정말 이렇게 제 목소리로 해도 되는지 되묻기도 했어요. 그동안 꾸미지 않은 목소리로 작업해본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지금 한국에서 살아가는 20대 여성들이 실제로 말하는 방식을 떠올리고, 편한 목소리로 감정과 연기에만 집중했어요. 그러자 말이 훨씬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김예림 선배님이 맡은 조이, 김도영 선배님이 맡은 미라와 연기 호흡을 직접 맞추지는 못했어요. 영화 더빙은 음향상의 이유로 각자 녹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공개된 완성본을 보니 HUNTR/X 세 사람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졌어요. 성우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상대의 말을 상상하고 평소처럼 역할을 잘 해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세 사람이 부른 ‘Golden’ 한국어 커버도 작품 공개 뒤 참석한 한 동료의 결혼식에서 시작됐어요. 김예림 선배님과 김도영 선배님을 공개 이후 거의 처음 다시 만난 자리였고, 작품이 크게 사랑받아 기쁘다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두 분이 커버를 제안했습니다. 두 분은 노래를 잘하지만 저는 노래와 담을 쌓고 지내온 사람이라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원작의 노래가 한국어 번안 없이 그대로 쓰인 작품이라, 한국어 가사로 부르면 많은 사람이 볼 것이라는 점도 오히려 더 부담스러웠습니다.
저를 움직인 것은 김도영 선배님의 말이었어요. 남들이 어떻게 볼지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우리끼리 재미있게 노는 것처럼 해보자는 말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흔치 않은 작품을 함께한 데다 든든한 두 선배님과 하는 일이니 저도 업혀가는 마음으로 참여하기로 했어요. 그래도 아무 준비 없이 갈 수는 없어서 녹음까지 남은 일주일 동안 보컬 레슨을 집중적으로 받았습니다.
김예림 선배님이 영상 편집을, 김도영 선배님이 한국어 가사 번안을 맡았어요. 김도영 선배님이 그날 저녁 바로 가사를 써 보내준 것을 보고 저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전부터 작업 인연이 있던 이신혁 크리에이터님은 녹음부터 믹싱까지 흔쾌히 도와주셨어요. 제가 한 일은 열심히 노래를 연습한 것뿐이라고 느낄 만큼 여러 사람이 힘을 보탰습니다. 그렇게 함께 즐기며 만든 결과물이어서 많은 분도 좋아해 주신 것 같아요.
작품 안에 편안히 녹아드는 사람
저를 가장 크게 바꾼 순간을 하나 고르라면 대원방송 10기 최종 전형에서 떨어졌을 때예요. 마지막 관문까지 갔으니 기대가 컸고, 그래서 가장 깊이 좌절했습니다. 하지만 그 경험은 이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애정과 확신도 더 분명하게 만들어줬어요. 포기하지 않은 순간들이 쌓여 제 노력의 일부가 되었고, 거기에 좋은 시기와 운이 만나 지금의 배역들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장리와 루미, 《블루 아카이브》의 유우카처럼 많은 사랑을 받는 인물들을 운 좋게 만났어요. 그 캐릭터들을 통해 제가 열심히 살아온 시간들이 마냥 헛되지는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실패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 시간을 지나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기회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인간 신나리의 장점을 하나 고르라면 성실함이에요. 조금 식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저는 타협을 잘하지 못합니다. 녹음 중 글자를 잘못 읽는 일을 특히 싫어해요. 라이브 방송이 아니니 틀리면 다시 녹음할 수 있지만, 저는 한 번에 흐름을 타고 이어가는 편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대본의 한 글자라도 더 보고 실수를 줄이려고 해요. 그런 성격이 제가 계속 성우답게 일하게 하는 힘인 것 같습니다.
10년 뒤의 저는 지금을 돌아보며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네”라고 말할 만큼 성장해 있었으면 좋겠어요. 지금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잘하는 사람이 되어, 현재의 부족함을 웃으며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팬들에게는 편안한 성우로 기억되고 싶어요. 작품 밖으로 튀어나오거나 혼자 눈에 띄는 목소리보다 그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연기자요. 당장은 알아채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돌아봤을 때 “여기에도 나왔고 저기에도 나왔네. 그런데 모두 듣기 좋았다”고 발견되는 성우가 되고 싶습니다.
저도 게임과 애니메이션을 즐기는 소비자로 시작해 이제 창작의 한 부분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녹음할 때마다 이 작품을 보는 사람이 어떻게 느낄지를 생각해요. 한국어 더빙을 사랑해주는 분들과 제가 맡은 캐릭터를 특별히 아껴주는 분들이 다음 이야기에 더 깊이 몰입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그 인물들을 함께 사랑하며 책임감 있게 연기하겠습니다.
